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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월드 일기

새학기, 힘겨웠던 일주일, 그리고 클로즈드 노트

첫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로 얼굴도 익히지 못한 선생님들이 쉰명이나 모인 교무실에서 무선마이크를 통해 교무회의를 한다.
교실에 들어선다.
수북한 먼지, 오래된 나무바닥에서 나는 퀘퀘한 냄새, 반백년은 되어보이는 낡은 창문과 잘 여닫히지도 않는 미닫이문,
그리고 언발란스하게 놓여있는 42인치 평면티비...
아이들은 이미 그 학교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자세로 새담임을 맞이한다.
첫수업은 늘 그렇듯 자기소개시간이다.
자기소개서를 나눠주자, 아이들은 못마땅한 듯 받아들고 성의없이 빈칸을 채워간다.
자발적으로 발표할 아이를 찾아봤지만, 역시나 없다.
지목하여 시켜도 시큰둥하다.
이미 자신이 다 커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 여자아이는 흘겨보는 눈을 하고는 발표를 하려하지 않는다.
이미 병아리가 아닌, 그렇다고 다 큰 닭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의 나이가 바로 초등학교 고학년이다.
첫주는 학습태도훈련을 시켜야지...하면서 다짐을 하고 갔는데 사실 아이들은 이미 5년간 익숙해져버린 학습태도가
있다. 그 아이들은 그저 따라오는 척만 해주는 것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아이들과 있는 시간은 그나마 행복한 시간이다.
하루종일 실수의 연발이다.
새로운 학교에서, 하다못해 어디에 내 신발을 둬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당장 처리해야할 공문들만 대여섯건이
넘는다. 결재판도 없고, 누가 교무선생님인지 어디에 가야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결재가 끝난 문서를 접수하기 위한 전자문서의 비밀번호도 모르고,
아이들이 몇층 급식소에서 밥을 먹어야하는지 어디에서 청소를 해야하는지도 모른다.
새학기로 모두들 바쁘고,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
책상은 온통 업무와 관련된 서류들이다.
어느 순간부터 공교육을 살리겠다고 나온 정책들이 공교육을 망치고 있다.
그런 정책들은 교사들로 하여금 업무에 대한 부담을 주게 되고 결국 가장 중요한 수업에는 소홀하게 만든다.
학교폭력실태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우리반 아이가 누구에게 맞고 다니는지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다.
어린이회 선거에 관한 수십장이나 되는 규정들을 살펴보고 기안을 짜느라 실제로 누가 리더쉽을 가지고 있으며
어린이회장에 나갈만한 인재인지 파악할 시간도 없다.
교사들의 업무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메신저때문에 쉴 새 없이 무엇인가를 작성해 보내야한다. 결국 내 책상 위에
놓인 아이들의 일기장은 검사할 시간조차 없다.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충실할 수 있어야하며,
아이들이 간 후에는 교실을 살펴보고, 하루를 돌아보며, 내일을 설계해야한다.
그것이 진짜 교육이다.
업무와 공문따위는 교사의 몫이 아니라 전담인력을 둬야한다.
진짜 공교육을 살리고 싶다면 말이다.
정부가 정말로 사교육을 없애고 싶다면, 그 학원강사들에게 우리와 같은 과중한 업무를 주면된다.
그러면 그들도 결국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시간이 없을테니까 말이다.
퇴근시간이 지나고서도 한참을 일만하다가 결국 저녁밥도 먹지 못하고 배가 고파서 퇴근을 해야만 했던
지난 일주일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어제와 오늘도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느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가,
정말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영화 한편을 봐주기로 했다.
W가 추천해준 영화 "클로즈드 노트"
역시 일본영화가 주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힘이 있다.

 

와비와 사비

업무가 아닌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찾아오려나?
뭐 이제 근천스러운 얘기는 각설하고...
어쨌든 이 영화를 보고 만년필이 갖고 싶어졌다.
"슥슥~~~" 쓰여지는 그런 만년필...

 

 

 

 

7년 전 이 맘때쯤 일기이다.  얼마나 미숙한 교사이며, 얼마나 부끄러운 인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 때는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교사였다. 물론 지금도 엄청 능숙한 교사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사의 자질이 어찌 '능숙함'에서 나오겠는가? 이제는 그저 아이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고, 조금 더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 같다.

늘 같은 시기에 겪는 일들이지만, 요즘의 내가 겪는 새학기는 생각보다 기대되고, 설렌다. 새학기 업무나 서로에게 적응을 해야하는 힘듦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 과정이 예전처럼 스트레스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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