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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월드 일기

수준과 만족

살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의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다.

덜덜거리는 중고차이긴 하지만 오너드라이버가 되었고
두평에 천장이 머리에 닿는 자취집에 살다가
지금은 임대아파트이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아파트에 살고 있다.
예전엔 몇 십원이라도 더 싼 라면을 사기위해 그 좋아하던 오징어 짬뽕을 사지 못하고
분말스프와 건더기스프가 따로 있지 않고
하나의 스프봉지만 들어있던 안성탕면을 사먹었다.
그것두 여자친구와 먹을 때나 계란이 들어가곤 했었다.
하지만 이젠 라면은 신라면이 되었든, 무파마가 되었든 라면은 그저 싸구려 불량 음식 밖에 되지 못한다.
일일이 다 나열하진 못하겠지만 여튼 내 삶의 수준(그것의 물질적 풍요로움이라고 볼 때)은
경이로운 상승 그래프를 그리며 올라갔다.
하지만 그 향상된 삶의 수준이 과연 궁극적인 만족감도 향상을 시켜주었냐
라고 생각을 한다면 글쎄~~다라고 말할 것이다.
예전엔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극한의 만족감은 아니더라도
적당한 수준의 만족감을 얻었었다.
특히 식후, 그것도 돼지박사나 싸다돼지마을 같은 싸구려 고깃집에서
삼겹살이나 갈비를 배터지게 먹고 계산 후에
운동화에 발을 구겨넣으면서 자판기 버튼을 눌러 뽑아 먹던
자판기 커피는 항상 적절한 만족감을 주었다.
그야말로 적절한 만족감이었다.
삼겹살이나 갈비를 먹은 후에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라고 한다면
그 자판기 커피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에스프레소 커피 전문점이 전주에도 즐비하게 되고
커피 맛에 대한 사람들의 수준도 올라가게 되었다.
신맛이 어쩌구, 단맛이 어쩌구, 바디감이 어쩌구....
나도 이제는 에스프레소 커피나 핸드드립 커피를 마신다.
그것을 맛 보는 순간
'아 이것이 커피 맛이구나, 예전에 마셨던 것은 커피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적절한 만족감이 아닌 그 이상의 만족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젠 자판기 커피는 이미 커피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던 커피 맛이
이젠 당연한 듯한 커피 맛, 즉 적절한 커피 맛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제 더 높은 수준을 찾게 된다.
한번 높아진 눈높이는 한도 끝도 없이 높아지게 된다.
이젠 더 좋은 재배환경에서 재배된 커피콩과
조금 더 훌륭한 로스팅과 블렌딩을 찾게 된다.
좀 더 수준을 높여줘야 좀 더 높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일단 높아진 커피에 대한 입맛 때문에 예전에 적절한 만족감을 주었던
자판기 커피는 이젠 어떤 만족감도 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투자비용과 노력이 늘어났지만 내가 느끼는 만족감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같아지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200원으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 이젠 몇 천원을 투자해서
느껴지는 만족감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 친구들과 배드민턴을 칠 때는 정확한 스텝과 스윙, 게임룰을 몰라도
그냥 재미있었다.
서비스를 제대로 넣지 않고 왼손으로 셔틀콕을 올려 머리 위에서 서비스를 넣어도
거위털이 아닌 플라이스틱으로 되어있는 셔틀콕을 써도
20만원짜리 그라파이트, 티타늄 재질이 아닌 이마트에서 파는 2만원짜리
철재 라켓으로 게임을 해도 불편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항상 적절한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동호회에 가입하고 레슨을 받으면서 기존에 했던 배드민턴은
배드민턴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됐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드민턴의 재미구나!
생고무로 된 배드민턴 전용화를 신어야하고, 20만원짜리 라켓을 사용해야한다.
정확하게 스텝을 밟아야하고 게임룰은 정확하게 지켜야한다.
이제 예전에 친구들과 아무런 룰도 없이 싸구려 장비로 치던 배드민턴은
재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내가 생고무 운동화를 신고 비싼 라켓으로 치고 있는 배드민턴은
어느 순간 예전에 느꼈던 그 적절한 재미밖에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니 심지어 그 재미보다도 낮은 만족감을 갖게 된다.
이미 높아진 눈높이 때문에 나의 실력에 대해 좌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좀 더 레슨을 받아서 좀 더 좋은 장비로 배드민턴을 쳐야만 그 만족감을 얻게 될 것 같다.
많은 것들은 수준이 높아지면
잠깐의 만족감과 끝없는 욕심이 생기게 된다.
단적인 예들이었지만,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것들이 그렇다.
그래서 그리워지는 것들이 많다.
두평짜리 자취방의 슬레이트 지붕에 떨어지던 빗소리와
한가한 주말이면 소양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여행을 하던 뚜벅이 생활이나
계란도 없이 끓여먹었던 안성탕면과
2500원짜리 삼겹살집에 삼겹살을 먹은 후 마셨던 자판기 커피
그 모든 것들이 그리워진다.
앞으로 내 삶의 수준이 더 높아지더라도
만족감이 높아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 삶의 만족감을 위해서 난 어떻게 살아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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